이탈리아를 여행하는 많은 이들이 로마, 피렌체, 베네치아 같은 대도시만을 떠올리지만, 진짜 이탈리아의 아름다움은 소도시에 있습니다. 특히 느리게 머무르며 도시의 리듬에 몸을 맡길 수 있는 ‘슬로우시티’는 한적한 풍경과 여유로움을 사랑하는 여행자에게 완벽한 선택이 됩니다. 그중에서도 치비타 디 바뇨레조(Civita di Bagnoregio)와 오르비에토(Orvieto)는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면서도 전혀 다른 분위기와 감동을 선사하는 도시입니다. 이 두 도시를 비교하며 어떤 여행자에게 어떤 도시가 더 잘 어울릴지 살펴보겠습니다.
치비타 디 바뇨레조 – ‘죽어가는 도시’의 낭만과 감성
이탈리아 중부 라치오(Lazio) 지역의 언덕 위에 자리한 작은 마을, 치비타 디 바뇨레조(Civita di Bagnoregio)는 ‘죽어가는 도시’라는 다소 슬픈 별명으로 유명합니다. 이 명칭은 단순한 은유가 아니라, 수세기 동안 침식과 지진으로 인해 지반이 무너지고, 도시가 점점 축소되어가는 실제적인 상황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위태롭고도 고요한 풍경은 도시를 더욱 매력적인 장소로 만들어줍니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듯한 황량한 절벽 위에 올려진 이 마을은, 마치 세상과 단절된 고립의 미학을 품고 있는 듯합니다. 도시에 입장하려면 외부와 유일하게 연결된 보행자 전용 다리를 건너야 하는데, 이 긴 다리를 걷는 동안 일상의 번잡함은 서서히 멀어지고, 그 끝에 이르면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르는 세상이 펼쳐집니다.
치비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맞이하는 것은 정적입니다. 자동차 소리도, 군중의 소란도 들리지 않고, 대신 발끝에 닿는 돌길의 감촉과 햇살이 스치는 벽돌의 따스함, 그리고 가끔 골목을 가로지르는 바람 소리만이 존재합니다. 이곳은 인위적인 관광지의 느낌과는 거리가 멉니다. 유명한 랜드마크를 보기 위해 서두를 필요도 없고, 굳이 목적지를 정해 움직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오히려 진정한 치비타의 매력은 무계획으로 마을을 걷는 그 자체에 있습니다. 돌로 지어진 오래된 주택들과 넝쿨이 드리운 벽, 작은 분수와 그늘 아래 놓인 나무 벤치는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여행자의 감성을 자극합니다. 특히 해질 무렵, 석양이 도시 전체를 붉은빛으로 물들일 때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고요한 아름다움이 마을 전체를 감쌉니다.
여행 중에는 마을 중심부의 작은 오스테리아나 트라토리아에 들러 지역산 와인 한 잔과 함께 파스타 한 접시를 즐기는 것이 가장 로컬다운 경험입니다. 치비타는 상업화되지 않은 마을답게, 현지인이 직접 운영하는 소박한 식당이 대부분이며, 이탈리아 시골의 정취와 정성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습니다.
결국 치비타 디 바뇨레조는 ‘죽어가는 도시’라는 별명이 무색할 만큼, 오히려 삶의 본질적인 아름다움을 가장 단순한 형태로 보여주는 곳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천천히 걷고, 햇살을 느끼고, 돌담에 기대어 한참을 앉아 있는 그 시간이, 도시에서 보내는 어느 화려한 하루보다 더 진하고 깊은 여행이 되어줄 것입니다.
오르비에토 – 언덕 위의 중세도시, 와인과 문화의 향기
이탈리아 움브리아(Umbria) 지역의 언덕 위에 우아하게 자리한 도시, 오르비에토(Orvieto)는 고대 에트루리아 시대부터 중세, 르네상스,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역사가 층층이 쌓인 살아 있는 문화유산입니다. 기차와 푸니쿨라(언덕 기슭에서 시내 중심부까지 운행하는 케이블 전차)를 이용해 손쉽게 도달할 수 있어, 로마나 피렌체에서 당일치기로 다녀오기도 좋고, 중세 도시 특유의 위엄과 정갈함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완벽한 소도시입니다. 멀리서 오르비에토를 바라보면 거대한 현무암 절벽 위에 솟은 도시의 실루엣 자체가 예술처럼 보이며, 가까이 다가갈수록 고요한 품격과 문화적 깊이가 배어 있습니다.
이 도시의 상징은 단연 오르비에토 대성당(Duomo di Orvieto)입니다. 고딕 양식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이 성당은 금빛 타일과 정교한 조각상으로 장식된 파사드(정면)가 눈부시게 아름답습니다. 햇빛이 비치는 각도에 따라 외관의 색감이 변화하며,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냅니다. 내부로 들어서면 천장을 수놓은 프레스코화와 스테인드글라스 창, 그리고 섬세하게 조각된 기둥들이 고요하고 신성한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특히 '최후의 심판'을 그린 루카 시뇨렐리(Luca Signorelli)의 프레스코는 미켈란젤로에게 영감을 주었다고도 전해질 만큼 예술사적으로도 중요한 작품입니다.
하지만 오르비에토의 매력은 대성당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이곳은 지하 도시(Underground City) 체험으로도 유명한데, 수백 개의 동굴과 터널이 절벽 속에 뚫려 있으며, 고대 에트루리아인부터 중세 수도승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대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현지 가이드와 함께하는 투어를 통해 암반 채석장, 중세의 와인 저장고, 비밀 탈출 통로 등 평소엔 볼 수 없는 세계를 직접 체험할 수 있습니다. 어둡고 습한 공간 속에서도 살아 있는 역사와 이야기를 마주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여행자들에게 색다른 감동을 선사합니다.
또한 오르비에토는 슬로우시티(Slow City)로도 지정되어 있어, 패스트푸드나 대형 체인점 대신 전통 방식을 고수하는 레스토랑과 로컬 상점들이 많습니다. 특히 이곳에서 생산되는 오르비에토 DOC 와인은 상쾌한 산미와 부드러운 풍미로 전 세계 미식가들의 사랑을 받고 있으며, 트러플을 활용한 다양한 요리와 함께 즐기면 오르비에토의 풍미를 온전히 음미할 수 있습니다. 소박하지만 정성스러운 식사는 도시 전체가 전하고자 하는 느린 삶의 철학과도 잘 어우러집니다.
비록 하루 일정으로도 주요 명소를 둘러볼 수 있는 도시지만, 조금 더 깊이 있게 머물러 보고 싶은 여행자라면 1~2박 정도 여유 있게 시간을 할애해보길 권합니다. 낮과 밤, 해가 질 무렵 성벽 위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모두 다른 감동을 주며, 카페에 앉아 시간을 보내는 그 자체가 여행의 완성으로 느껴질 것입니다. 오르비에토는 단지 예쁜 소도시가 아니라, 시간의 흐름을 담담히 견뎌온 깊은 지혜와 감성을 품고 있는 곳입니다. 떠날 때쯤이면 분명, ‘여긴 꼭 다시 오고 싶다’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생겨날 겁니다.
두 도시의 비교
두 도시를 비교해보면 치비타 디 바뇨레조는 조용한 감성과 시각적 감동을, 오르비에토는 역사와 콘텐츠, 그리고 입체적인 도시 탐방의 재미를 줍니다. 치비타는 걷기와 풍경, 느린 삶을 경험하는 데 집중되어 있고, 오르비에토는 보다 다채로운 활동과 유적, 예술적 감흥이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번잡한 도시에서 벗어나 자연과 정적 속에서 힐링하고 싶다면 치비타가 제격일 것이고, 다양한 볼거리와 음식, 문화를 경험하고 싶다면 오르비에토가 더 나은 선택이 될 것입니다.
두 도시의 거리는 약 30km로 가깝기 때문에 하루 일정 안에 두 곳 모두 방문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오전에는 치비타에서 감성 가득한 산책을 즐기고, 오후에는 오르비에토로 이동해 대성당과 와인을 즐기는 방식이 대표적인 추천 루트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슬로우시티 여행의 본질은 많은 곳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한 곳에 천천히 머물며 ‘느낌’을 경험하는 데 있다는 점입니다. 여러분의 여행 스타일에 맞는 도시를 선택하고, 빠름에서 벗어난 이탈리아의 진짜 매력을 온전히 누려보시기 바랍니다.